[타코마 제일침레교회] 고엘을 만나다

전문가 칼럼

[타코마 제일침레교회] 고엘을 만나다

□ 본문: 룻기 4:1-5


룻기의 배경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뜻은 빵집 입니다.  


룻기 1장에서 엘리멜렉의 가족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먹고사는 빵의 문제로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모압에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고, 나오미와 며느리 룻만이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가문을 이을 남자가 다 죽었기에, 이제는 집/가문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지만, 보아스의 배려로 빵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이제 끊어졌던 엘리멜렉의 가문을 회복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세우고 회복하는 것은 오직 기업 무르기라고 불리는, 고엘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고엘은 누군가를 구원하는데 비용을 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레위기 25:25, 신명기 25:5)으로 고엘제도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이 이를 지켜야 했습니다. 


고엘제도는 어려움을 당하고 도저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형제나 친척이 그 문제를 나의 일로 여기고 책임을 지고, 해결을 해 주는 제도입니다. 누군가의 고엘이 되어 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룻을 눈여겨 보았던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의 고엘이 되기로 결심하고 룻과 나오미를 구원하는데 비용을 내어 고엘이 되기를 작정했습니다. 하지만 고엘의 우선권이 보아스에게 없다는 문제가 있었었습니다(4절). 


그래서 보아스는 고엘의 우선권이 있던 친척에게 룻과 나오미의 고엘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5절).  


보아스의 말에 대하여 첫번째 우선권이 있던 남자는 대답합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룻 4:6) 이 남자는 고엘 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왜냐면 자신이 갖고 있는 기업의 손해가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소유로 되어 있는 밭을 구입하기 위해 나오미에게 돈을 지불해 주어야 하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를 장성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키워줘야 하고, 그 아들에게 유산도 나누어 주어야 하니 자신에게 손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계산해 보니,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고엘이라는 신성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어디서 많이 본 모습 아닌가요?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고엘 제도와 같은 것은 정말 좋은 제도이다 훌륭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대상이 되면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나와는 상관 없다고 여기고, 손해 보려 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사기와 룻기에서 보여주는 시대상은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이 사라지고 깨져 버려서, 자기 

멋대로 살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 그 아무도 형제를 위하여 고엘이 되려고 하지 않는데, 이것은 먹고사는 빵 문제의 회복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해결, 진정한 공동체의 회복, 고엘의 전통을 회복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고엘이 되어서 죽어가던 엘리멜렉의 가문이 살아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아무도 신성한 의무를 다하려 하지 않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 보아스를 통하여 놀라운 회복의 이야기가 쓰여집니다. 룻기 4장 후반부를 보면, 보아스와 룻은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룻과 보아스는 예수님의 족보에도 올라갔습니다. 놀라운 가문의 축복과 회복을 보아스의 고엘의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두가지를 나누겠습니다. 


1. 우리에게는 진정한 고엘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44:22에서 “구속하였다라”라는 표현이 “고엘”에 해당합니다. 구원자, 구속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기업 무를자, 고엘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진정한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만났다면, 그분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회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2. 우리는 누군가에게 고엘이어야 합니다. 


룻기 4:1에서 보아스는 고엘의 우선권을 갖고 있던 사람을 향하여 “아무개”라고 부릅니다. 저는 아무개라는 표현이 당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시대상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시대는 그냥 아무개로서 살면서, 그 의무를 다하지 말고, 자기 멋대로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개인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에 물들어, 아무개로 이름 없이 살고 싶어하지, 진정 고엘로서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아 합니다. 손해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좋지만, 하나님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유익이 없으면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무개가 되지 말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보아스와 같은, 그리고 예수님과 같은 진정한 고엘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고엘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의 고엘로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교회와 가정, 그리고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진정한 고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엘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용서하고 포용하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 진정한 고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용서하는 것이고, 포용하는 것이며, 희생하고 손해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 나눔 적용 질문


1. 나의 진정한 고엘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2.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내가 고엘로 다가가 만나주어야 할 지체는 누구이며, 어떻게 고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을지 나누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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